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허기를 안고 산다
처음엔 불편했다
처음 몇 회는 보는 내내 약간 불편했습니다.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요즘은 줄여서 '모자무싸'라고 부르더군요.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와 '동백꽃 필 무렵'의 차영훈 감독이 만났다는 것 만으로도 방영 전부터 화제였습니다.
무대는 영화계입니다.
20년째 시나리오 14편을 썼지만 단 한 편의 영화도 만들지 못한 영화감독 지망생 황동만(구교환).
대학 시절 함께 영화를 꿈꿨던 '8인회' 멤버들은 저마다 화려하게 데뷰했는데, 마흔이 넘도록 혼자만 풀리는 것이 없는 주인공은 '시기'와 '질투', '자기혐오'로 좌충우돌합니다.
그 황동만 곁에 천재 PD 변은아(고윤정)가 있습니다. 나약함 냄새를 맡는 데 도가 튼 여자, 자신도 무너지기 직전이면서 황동만의 '공포에 쩐 상태'를 알아보는 사람.
처음에 이 드라마가 불편했던 건 황동만 때문이었습니다. 게걸스레 밥을 먹으며 입을 멈추지 않고, '여기 있는 나 좀 보라'며 안간힘으로 주변을 피곤하게 만드는 남자.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이 불편함이 낯섦이 아니라 낯익음에서 온다는 걸 깨닫게 되더군요.
감정 덩어리들의 이야기
이 드라마의 진짜 주제어는, 제가 보기엔 '감정'이었습니다.
극 중에 '감정워치'라는 장치가 나옵니다.
심장 박동, 체온, 뇌파 같은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착용자의 현재 감정을 문자로 띄워주는 시계입니다.
황동만과 변은아가 이 실험에 참여하면서 워치를 차고 있는데 이게 단순한 소품이 아닌 작품 전체의 감정 지도를 만드는 열쇠였습니다.
워치에는 '분노', '슬픔', '절망', '난감' 같은 감정들이 뜹니다.
그런데 때로는 '알 수 없음'이라고 표시됩니다. 명확하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분노도 슬픔도 절망도 아닌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닌..
변은아의 감정워치에 '알 수 없음'이 뜨는 순간은 분노, 절망, 슬픔이 90% 이상이고 간절함이 조금 뒤섞인 상태입니다. 그녀는 그 감정을 담당 의사에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폭, 자폭하고 싶은…"
그리고 황동만은 그 '알 수 없음'을 '허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울컥했습니다.
'아, 이 작가는 이 감정을 실제로 느껴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에 '자폭하고 싶은'이라는 감정과 '허기'라는 감정이 사실은 같은 결을 가진 것들이라는 것, 채워지지 않아서 터져버리고 싶다는 것, 그 '알 수 없음'의 정체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제 안에서도 '그래, 바로 그거야' 하고 공명하고 있었거든요.
이 드라마가 다루는 것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기 다른 '감정 덩어리'들입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안에 있으면서도 카메라 밖에서도 완벽한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통제광 적인 톱배우 오정희(배종옥). 해외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명성에도 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의식 속에 갇혀 사는 여자. 그녀의 감정 덩어리는 '공허'겠지요.
황동만의 형 황진만(박해준)은 등단한 시인이지만 그의 방식으로 아우를 짓누르는 또 다른 무가치함을 품고 있습니다.
박해영 작가의 작품에서 행복(나의 아저씨), 자존(나의 해방일지), 평안(모자무싸)은 타인과 함께 구하는 것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국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공허한 사람들이 서로의 허기를 알아보고, 그걸로 조금씩 채워나가는 과정.
변은아는 황동만이 '공포에 쩐' 상태임을 느끼고, 황동만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인간인데 인간적이지 않은 게 제일 무능한 거야."
이 대사 하나로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거의 다 설명됩니다.
'무가치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에 대하여
이 드라마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 있어지겠다'는 몸부림이 아닌, 그냥 '무가치하지 않겠다'는 몸부림.
이 둘은 방향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어딘가를 향해 올라가려는 것이고, 후자는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으려는 버팀입니다.
황동만이 8인회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 것, 잘난 친구들 앞에서 게걸스레 밥을 먹으며 입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무가치하지 않겠다는 몸부림'입니다.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존재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 같은데 어떻게 조용히 있어."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뭔가가 찌르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황동만처럼 위악스럽게 굴지는 않아도, 이 문장이 낯설지 않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내 허기를 채우려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감정 워치'가 황동만의 손목에서 '난감'이라고 뜨는 장면, 장미란이 황동만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의 그 '난감', 이 감정이 그대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설정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현실적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다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주말이 기다려지는 이유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는 항상 처음에 불편합니다.
'나의 아저씨'도 그랬고 '나의 해방일지'도 그랬습니다.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느리고, 너무 조용해서 드라마에 기대하는 극적인 장치들이 없습니다.
대신 대사가 심장에 불도장을 찍습니다.
'모자무싸'는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황동만이라는 기존 박해영 작품의 주인공들보다 훨씬 더 핀치에 몰린 인물이 나옵니다.
더 찌질하고, 더 불편하고, 더 절박합니다. 그래서 더 솔직합니다.
지금 이 드라마가 주말마다 기다려지는 이유는 여기 나오는 감정들이 낯설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허기지고, 자폭하고 싶고 알 수 없는 그 감정의 결.
박해영이라는 작가는 어쩌면 그것을 살아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것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허기를 안고 삽니다.
그것이 '알 수 없음'으로 표시될 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게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 내일이면 11, 12회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되네요.
간만에 천천히 생각할게 많아지는 드라마를 만나게 되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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